[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] 류승완, 자투리 필름으로 독립영화 찍어 파란

한국일보

<34> ‘액션 키드’에서 1,000만 흥행 감독 된 류승완 

‘죽거나 혹은 나쁘거나’(2000)는 한국 독립영화계의 일대 사건이었다. ‘파업전야’(1990) 이래 장편 독립영화의 씨는 마르다시피 했고 액션 영화가 주류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, 총제작비 6,500만원의 저예산으로 찍은 이 놀라운 데뷔작은 ‘액션키드’ 류승완(46) 감독을 단번에 충무로의 슈퍼 루키로 떠오르게 했다. 영화의 시작은 ‘하드보일드’라는 제목의 각본이었다. 단편 ‘변질헤드’(1996)를 찍은 후 박찬욱 감독의 ‘삼인조’(1997), 박기형 감독의 ‘여고괴담’(1998), 곽경택 감독의 ‘닥터 K’(1999) 등의 영화에 연출부로 활동하던 류 감독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틈틈이 감독 입봉을 준비하고 있었다. 그러나 신출내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에 힘을 보태줄 제작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, 벽에 부딪친 류 감독의 선택은 영화를 쪼개서 찍는 것이었다. 한 편의 큰 이야기를 네 편의 에피소드로 재구성한 뒤, 형편이 되는대로 나눠 찍은 단편을 도로 합쳐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옴니버스 영화를 구상한 것이다.

director ryoo

◇류승완 신화의 시작 

장선우 감독의 ‘나쁜 영화’(1997)를 찍고 남은 자투리 16㎜ 필름을 가져와 찍은 ‘패싸움’(1998)이 부산단편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받았고, 1999년 인디포럼에서 차기작 지원 감독으로 선정되어 만들게 된 ‘현대인’(1999)이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장편으로 확장될 길이 열린다. 공포물 컨셉트의 ‘악몽’(2000)과 흑백으로 촬영된 ‘죽거나 혹은 나쁘거나’가 덧붙여지면서 영화는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된다. 3년에 걸친 영화의 제작과정 내내 류 감독의 기조는 ‘헝그리 정신’이었다. 생계와 제작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 보수 공사현장에서 일하다가 시멘트 독이 빨갛게 오른 얼굴로 ‘패싸움’ 상영회에 참석했고, ‘현대인’이 본선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을 땐 동생 류승범과 고구마 장사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.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촬영하다 혼이 나거나, 빠듯한 시간 안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하다 도망치듯 나오고, ‘현대인’의 결투 장면은 박정이 조감독의 집 주차장에서 찍는 등 게릴라식 촬영의 연속이었고, 배우들은 노 개런티임에도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했다. 그 중에는 극 중 성빈의 아버지 역으로 특별출연한 이장호 감독, 그리고 훗날 ‘올드보이’(2003)부터 ‘아가씨’(2016)까지 박찬욱 감독의 눈과 손이 되는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오 출연도 있었다.

… 중략 …

현재 류 감독은 1990년대 소말리아 내전 때 남북한 대사관 공관들의 실화를 다루는 ‘탈출’(가제)를 준비하는 중이다. 성공이든 실패든, 전작이 남긴 교훈을 지침 삼아 그때마다 궤도를 수정해온 류 감독의 영화적 모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.